1926년10월09일(2면 7단) 뻔뻔한 구무상차(久武常次)는 고소 취하를 애원 피해 소년은 당처(當處)를 보면서 흐느껴울며 호소했다 이와 같이 의외에 억울한 사형(私刑)을 받은 용채(鎔彩)는 발가벗은 몸으로 집에 돌아와 부형(父兄)에게 이 사실을 흐느껴 울며 호소한 결과 그 부형과 동리 사람들은 가혹한 사형으로 부어올라온 당처(當處)를 만져보며 일시는 자목 흥분한 상태에 있었는데 다만 송용(松茸)을 채취하려고 등산했다는 혐의만으로 이와 같은 전래에 없는 죄악행을 감히 한 것은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여 의론이 분분하였는데 이 사실을 탐문한 석사리(碩士里) 주재소에서는 9월 30일 피해 아동과 그 사형(舍兄)을 호출하여 사실을 물은 즉 전항(前項)과 같이 틀림없이 진술함으로 청취 보고를 춘천경찰서에 제출하였더니 그 후 이를 짐작한 구무(久武)는 용채의 사형을 찾아보고 고소 취하를 애원함으로 그 사형은 마지못하여 취하를 승낙하여 취하서에 날인하였으나 원래 피해자가 고소함이 아니고 경찰이 탐문하여 고발한 것임으로 과연 취하가 성립될지 그 여부는 의문이라 한다 천석군(千石君)이 구무상차 탐민고혈(貪民膏血)을 착취하여 지금은 갑부 인도(人道)상으로 보아 용서키 어려운 금번 사건의 장본인 구무상차(久武常次)는 춘천 유수의 실업가라는 명칭을 듣는바 그는 항상 춘천을 대표하는 회합에 참여할 뿐 아니라 공직상으로 보아도 뭇사람의 존경을 받을 만한 지위에 있다 그 전에는 춘천면장을 위시하여 학교평의원 면협의원 도평의원 등 중직에 있었고 현금에는 춘천금융조합장 면협의원 각진회(覺進會) 고문 실업조합장 등의 요직에 있고 사영(私營)으로는 질옥(質屋)을 위시하여 우유 목장 인쇄업 과수원 등을 경영하는바 그 중에 특히 고리대금으로써 금일의 거재(巨財)를 형성한 까닭에 제일의 천직(天職)으로 한다는데 각 방면의 풍평(風評)을 들어 종합해보면 저 사람이 고리로 대금을 줄 때에 저당권 설정은 물론이고 매도 증서에까지 날인을 받은 ○○한 수단으로써 빈농의 토지를 뺏어 20년 전 구무(久武)가 처음으로 춘천에 올 때에는 명자(名刺) 인쇄기 1태(台)만을 가지고 들어혼 형편이었더니 금일에 있어서는 1000석에 가까운 추수를 할 뿐 아니라 현금(現金)으로도 수십 만의 거래가 있다 한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의 악행이 있으나 당인(當人)의 후일을 생각하여 특히 숨김) 석사리(碩士里) 주재소 의복은 10여 일 후에 반환 구무가 벗긴 의복은 산지기에게 주어 그 자식에게 입히라 하였음으로 산지기는 그 의복을 입힌 모양이 분명한데 10여 일 후 사건이 확대되기 시작하자 구무는 이를 두려워하여 산지기에게 의복을 즉시 반환케 하였는데 추석에 새로 입은 의복이 남루한 의복이 되어 돌아왔음으로 그 부형은 기자가 방문하였을 때 ????더러운 의복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더라 이와 같이 구무(久武)와 학곡리(鶴谷里) 리민 간에는 금번 뿐이 아니라 항상 갈등이 일어나 리민이 삼림을 도벌(盜伐)했다는 구실로 구무가 석사리 주재소에 구두고 설유(說諭) 청원을 때때로 하는 까닭에 리민은 그 주재소를 일컬어 구무 순사 주재소라고 부른다 한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로도 구무는 자기 산림에서 150주(株)를 도벌했다는 이유로 그 동리 이천룡(李千龍) 박익삼(朴益三) 두 사람을 걸어 석사리 주재소에 설유원을 제출하여 리민은 주재소의 태도를 엿보고 있는 중이라는데 기자가 구무 순사 주재소 운운의 의미로써 소장(所長)에게 질문한즉 소장은 ????그런 말이 있습니까 매우 유감되는 말씀입니다 구무의 설유원은 수일 전에 두 사람을 걸어 제출했으되 그 사실의 진부(眞否)를 몰라 보류하고 있습니다????하더라 사형(私刑)사건과 성토협의 춘천 각 단체 금번 이 사형 사건이 점점 세인의 입에 오르게 되자 춘천에 각 단체도 용서키 어려운 악행이라 하여 이에 대한 성토방법을 협의 중이라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