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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cheon Digital Archives

윤희순 초상화
등록번호
00023833
생산일자
2019.03.01
생산지역
미상
생산자
신대엽
수집처
의암류인석기념관
소장자
의암류인석기념관
내용
이 초상화는 춘천문화원 의암류인석기념관에서 2019년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국가보훈처로부터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의병) 19명을 선정하여 춘천 거주 신대엽 화백이 전통방식으로 그린 것이다. 
윤희순(尹熙順)
-생몰년도: 1860.06.25.~1935.08.01.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강행되자 시아버지인 류홍석이 류중악(柳重岳)·류중락(柳重洛)등의 춘천 유림과 더불어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춘천과 가평 일대에서 의병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윤희순은 「안사람의 의병가」·「병정의 노래」 등 수십 수의 의병가를 지어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직접·간접으로 춘천의병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그 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이어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가 퇴위하고 군대마저 해산되자 정미의병이 봉기하였다. 이에 같은 해 8월 류홍석은 족숙인 류중악 등과 모의하고 가정리(柯亭里) 항골(恒谷)에서 류영석·류봉석·박화지 등과 더불어 의병 600명으로 가평 주길리(珠吉里) 등지에서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이 때 의병자금과 탄약·군량이 부족하게 되자 윤희순은 향민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해 여의내골(餘義川谷) 주산(周山)에서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여 무기와 탄환을 제조, 공급하였다. 한편 의병가를 만들고 부르게 하여 항일의병 정신을 고취시켰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류홍석이 일제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 하여 먼저 만주로 이주하였다. 이후 1911년 윤희순 가족 역시 류홍석을 뒤따라 만주로 들어가서 의병 재기를 도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3년 12월 류홍석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고, 1915년 1월 이미 망명해 온 류인석이 죽었으며, 남편인 류제원 또한 같은 해 10월 회인현(懷仁縣)에서 죽었다. 이에 윤희순은 대한독립단에 가입해 투쟁하는 돈상(頓相)·민상(敏相) 두 아들을 포함한 자손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맏아들인 돈상이 그의 처남 음성국(陰聖國)과 함께 일본경찰에게 잡혀 고문 끝에 1935년 7월 19일 순국하였다. 3대에 걸쳐 의병활동의 뒷바라지를 하던 윤희순는 10여 일 뒤인 8월 1일 자손에게 훈계하는 글과 일생기록을 남기고 향년 76세로 만주땅에서 일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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