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春川)】 이번 어대체(御大體)에 증위되어 내종(內從) 4위보다 일약 정 3위로 수여 받은 조소카베 모토치카(長曾我部元親) 씨는 춘천 히사타케 집안의 선조로 증위의 소식을 접했다. 히사타케 집안에서는 모당(母堂)을 비롯 히사타케 가문 일동은 높고 큰 은혜(鴻恩)에 감읍(感泣)했다. 동경에 있는 스테죠(捨女,히사타케 씨의 친족)가 서류를 가지고 총독부에 가서 밝히고 자주 말을 전했다. 『나는 이래도 되는지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오리무중,五里霧中입니다)』 라고 히사타케 씨와 모당은 대단하게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이사타케 집안에 소장한 계도(系圖)에 의하며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카와카츠 요시토시(河勝能俊) 20대 손이고 동시에 카와카 츠 씨는 죠 씨(徐氏) 15대에 카와카츠라고 고친 것으로 즉 서씨는 죠후쿠(徐福)이라 칭했다(진시황제 때) 인황(人皇) 16대 응인(應人) 천황 16년 때 진(秦)나라에서 일본으로 죠후쿠가 양잠 기업 제면(製綿) 등의 기술을 가진 남녀 1,000명을 배 3척에 태워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영약(靈藥)을 구하려고 와서 귀화한 것이 시작이다. 죠후쿠 15대에 이르러 손광륭(孫廣隆)은 카와카츠라 성을 고치고 그후 요시토시(能俊), 무네타나(宗忠), 쥬우지(重氏), 유키미츠(幸滿), 유키카네(幸兼), 쥬토시(重俊), 쥬타카(重高), 시게무네(重宗), 노브노(信能) 등 자손을 이었다. 노브노는 건무(建武)년 3월 3일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로부터 시코쿠(四國) 중국(中國)의 싸움에 가장 먼저에 참입(參入)한 표창장도 현재 히사타케 씨 소장한다. 또 카네노(兼能) 카네츠나(兼綱) 모토히데(元秀) 모토카네(元兼) 모토카도(元門) 오수오야(雄親) 카네히로(兼廣) 쿠니오야(國親) 등이 있고 쿠니오야는 요메이센오루(幼名千王) 이라고 칭하여 궁내(宮內) 소보(少輔) 시나노 수비(신농,信濃守)를 맡아 무용(武勇)으로 이름을 떨치고 죠후쿠로부터 15대 손 카와카츠 히로타카(河勝廣隆)의 자식 요시토시(카와카츠 1세)의 대에 이르러 문관에서 무가가 되어 도사(土佐)의 국사(國司)로 임명받아 조소카베의 고향에 거성(居城)했다.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카와카츠 20대 손으로 조소카베 야사브로(彌三郞)이라 칭하고 궁내 소보 종 4위 시종(侍從) 좌근위(左近衛) 소장(少將)이다. 당시의 가로(家老)*는 히사타케 히고 마모루(久武肥後守)를 필두로 10명이 있다. 또 모토치카의 자식 노브오야(信親)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로부터 휘자(諱字)를 하사받아 노부(信)의 글자를 붙이게 되었다 (이때 천정(天正) 14년 붕고(豐後)에서 시마즈(島津씨)와 필사로 전투를 하여 표창장 가진다. 이것 또 수길공(秀吉公)의 직필이다) 카와카츠 22대 모리치카(盛親) (조소카베 모리치카)은 기슈(紀州) 고야산(高野山)에서 전사(戰死)했지만, 사실은 쿠마모토(態本)에 가서 가토(加藤) 가문으로 들어가 이때 히사타케라고 개명하고 부지(扶持) 1,000석(石) 과 200명을 받아 히사타케 나이신스케(內臟助)라 칭했다. 모리오야(盛親)의 자식 히사타케 치스케(千助)(카와카츠 23대) 이 또한 같은 부지 가토 집안을 섬기지만, 이때 가토 가문 망해 낭인이 되어 그 자식 곤자(權佐), 곤타로(權太郎), 곤자에몽(權佐衛門), 또 타로(太郞), 효메이(兵明), 카네사다(兼定), 카네아키라(兼明), 타츠토(龍人), 카네토크(兼德), 토라이토(虎人) 등 있다. 토라이토는 현재 히사타케 츠네지씨(常次氏) 부인의 엄부(嚴父)에 해당하고 겐츠네지씨(現堂次氏)는 마츠시마(松島) 성로부터 데릴사위가 되어 히사타케 치스케로부터 히사타케 츠네지에 이르러 11대가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