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12월 24일에 류중악(柳重岳)이 작성한 간찰이다. 발신자인 류중악이 자신을 고자(孤子)라고 지칭하여 부친상을 치룬 것을 알 수 있다. 수신인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악실(堊室)의 장명자(將命者)라고 한 것을 통해 수신인은 상중임을 알 수 있다.
간찰에는 발신인의 이름만 기재되어 있는데, 연관문서인 을사년 간찰을 통해 성씨가 '류(柳)'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류중악(1843~1909)의 생몰연도를 통해 신미년(辛未年)은 1871년임을 알 수 있다.
내용을 보면 10월 말에 얼굴을 뵙고 난 후 못 뵈었는데, 그동안 인편이 없고, 있어도 바빠서 편지를 쓰지 못해 걱정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신인 형제의 안부를 묻고, 지난번에 외삼촌 이씨 어르신이 돌아가신 것에 대해 놀랍고 참담한 마음을 전하며 빈전(殯奠: 빈소를 마련한 후 올리던 제사)은 끝났는데 관(棺)과 금(衾) 같은 것은 어떻게 마련했는지 물어보았다. 빈전은 시신을 입관하고 영전에 간단한 술과 과실을 올리는 의식을 말하고 금은 시신을 싸서 염하는 홑이불을 말한다. 이어 자신은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가고 있으나 어머니가 노쇠하여 근심스럽고, 가읍의 사촌형수가 풍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형편을 전하였다.
류중악은 자신이 맹자를 읽다가 뜻이 의아한 곳이 있었는데 직접 질문하지 못하고 따로 적어 보내니 번거롭지만 가르쳐 주길 부탁한다 하였다. 이어 창수(昌秀)는 조금 알고 질문을 할 수 있는데다가 부끄러워 할 줄도 안다며 정자(程子)가 선으로 자신을 다스리면 변화하지 않는 자는 없다고 한 것이 믿을 만하니 인재는 어릴 때에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하였다. 어린애의 지각이 비록 어른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마음이 순해서 거짓이 없으니 어른의 허세가 고질이 된 것과 같지 않다고 하였다. 이어 지금 마을의 글방에서 가르치고 의례적으로 뜻을 알고 있는지 시험해보고 상이나 벌을 주는 것이 참으로 좋을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치지(致知)의 일이라고 하며 아울러 역행의 일을 갖추고 그 조약을 정해 인도하며 관장하고 징계하는 법으로 이어간다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문서에 마지막으로 연말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상중에 절제하고 몸을 잘 살펴 후학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바라며 편지를 마치고 있다.
류중악의 자는 백현(伯賢)이고, 호는 항와(恒窩)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에게 직접 배웠으며, 김평묵(金平默)도 스승으로 섬겼다. 집안의 형인 류중교(柳重敎)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조카인 의암 류인석(柳麟錫)과 동문으로 화서학파에 속한다. 류중악은 직접 의병활동을 하진 않았지만 류인석을 지원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류중악은 의리에 옳지 않은 것은 임금의 명령이라도 구차스럽게 따를 수 없다며 변복령이나 황제의 칭호, 광무 연호 등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