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순조 1)에 춘천부(春川府)에서 서상면(西上面) 신포리(薪浦里)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최준해(崔準海)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조선시대의 준호구는 오늘날의 호적등본, 주민등록등본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준호구는 각 가문이 필요 시에 해당 관청에 신청하였으며 관청에서는 호적대장의 내용에 의거해 등서하여 발급하였다. 준호구의 형식은 경국대전에 명시되어 있는데 발급일과 발급관서를 먼저 기재하고 '고간지성적호구장내(考干支成籍戶口帳內)'로 시작한다. 이후로 주호(主戶)의 거주지와 가족구성원, 주호와 처의 사조 및 소유한 노비에 대해 연서(連書)한다. 해당 문서는 이 형식에 맞추어 작성되었다.
문서에 따르면 최준해는 1731년[신해(辛亥)]생으로 당시 나이는 71세였고 본관은 수성(隋城)이다. 연관문서인 1759년과 1777년의 준호구에는 본관이 수원으로 되어 있으나, 본 문서와 이후의 문서들에는 본관이 수성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편의상 본관을 모두 수성으로 통일하였다.
1759년과 1777년의 문서에 따르면 거주지가 서상면 권산리였으나 해당 문서에 의하면 서상면 신포리로 거주지가 바뀌었다. 또한 주호의 이름도 1759년 준호구에는 최준해로, 1777년 준호구에는 최백해(崔白海)로 기재되어 있어 최준해가 최백해로 개명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본 문서에서는 다시 최준해로 기재되어 있어, 개명했다가 다시 본래의 이름을 쓴 것으로 보인다.
최준해의 부(父)는 학생(學生) 최승(崔昇)이고 생부(生父)는 유학(幼學) 최곤(崔晜)이다. 생부가 기재된 것으로 보아 최준해는 최승의 양자였음을 알 수 있다. 조부(祖父)는 학생 최태숭(崔泰崇)이고 증조부(曾祖父)는 학생 최수(崔燧)이다. 외조부(外祖父)는 학생 박제건(朴齊乾)이며 외조부의 본관은 밀양이다.
처(妻) 이씨(李氏)는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씨는 1777년 준호구에도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함께 사는 가족으로는 아들 생원(生員) 최내수(崔乃秀, 42세)와 자부(子婦) 안동권씨(安東權氏, 43세), 손자(孫子) 유학 최한달(崔漢達, 21세), 손부(孫婦) 평강채씨(平康蔡氏, 19세)가 있다. 아들 최내수의 출생연도가 연관문서인 1777년 준호구와 같은 것으로 보아, 1777년에 나오는 최준해의 아들 최종윤이 최내수로 개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777년 준호구에 등장했던 사위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분가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최준해가 소유한 노비의 수는 총 31명이며 그 중 남자종은 17명, 여자종은 14명이다. 노비의 출생년도는 모두 기재되어 있으나 부모 정보에 대해서는 불규칙적으로 기재되어 있다. 노비 31명 중 2명은 외거노비로 광주비 1명과 춘천노 1명이 있다.
한편, 춘천 수성최씨 가문의 문서로는 총 7통의 준호구가 현존한다. 첫 번째 문서는 1759년에 작성되었고 마지막 문서인 일곱 번째 문서는 105년 뒤인 1864년에 작성되었다. 시기 차이를 두고 작성된 총 7통의 준호구를 통해 수성최씨 가문의 가계 변화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서의 가치가 있다.